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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행 [ 흰여울 문화마을, 남포동, 용두산공원 ]

부산

by 화이트 베어 2018. 5. 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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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여울길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림으로써

마치 흰눈이 내리는 듯 빠른 물살의 모습과 같다하여 흰여울길이라 합니다.

흰여울길 주변일대를 제2송도라 일컫습니다.

바다 건너편 암남동의 송도를 제1송도라 하고 마주 보고 있는 이곳을 제2송도라 하였습니다.

영화 '변호인‘, ’범죄와의 전쟁',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등 수많은 작품의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

2011년 12월 공.폐가를 리모델링하여 지역 예술가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영도 구민들로 하여금 생활 속 문화를 만나게 하는 독창적인 문화․예술 마을로 거듭났습니다.

 해안을 끼고 걷는 굽이굽이 산책로, 절영해안 산책로
영도의 관문인 영도대교,

부산대교를 지나 영선동 아랫로타리에서 제2송도 바닷가쪽으로 500m정도 가다보면 반도보라아파트가 나타나고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관리동 및 휴게시설이 산책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에는 지형이 가파르고 험난한 군사보호구역으로 접근이 어려웠으나

시민들의 해양관광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공공근로사업으로 조성한 산책로로서,

대마도와 송도쪽으로 드넓은 바다 풍경을 배경삼아 연장 3㎞의 해안산책로를 2시간 정도

굽이굽이 거닐 때 마다 경치가 달라지고, 파도 곁으로 내려서면 자갈소리가 합창을 하며

곳곳에는 장승과 돌탑, 출렁다리, 장미터널, 파도광장, 무지개 분수대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다


골목길

흰여울길은 마을의 앞마당이자 버스가 다니는 절영로가 생기기 전까지 영도다리 쪽에서 태종대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절영로에서 흰여울길 사이에는 세로로 14개의 골목이 나있습니다.

전체로 보면 여러 갈래의 샛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습니다.

미로와 샛길이 많다는 것은 피란민들이 지내는 삶의 공간이 그만큼 힘들고 험난했음을 말해줍니다.

맏머리계단

흰여울마을의 들머리에 있는 200m 높이의 계단입니다. 계단 중간쯤에 주민들이 이용하던 맏머리샘이 있었다고 합니다.

꼬막집계단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폭이 좁은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생전에 금술이 좋았던 키 작은 할매 할배의 꼬막집을 만납니다.

무지개계단

마을의 중앙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흰여울마을에 무지개가 피어나기를 소망하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크레파스같은 계단을 오르면 영화 변호인 촬영지가 나옵니다

피아노계단

1990년대 말 절영해안산책로 개설 때 만들어진 피아노계단은 이송도 전망대와 맞닿아있습니다.

도돌이계단

이송도 전망대에서 피아노계단 반대편 중리 해변 쪽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입니다.

배들의 주차장 묘박지

흰여울문화마을 앞바다에는 중․대형 선박들이 바다 위에 떠 있는 이색적인 풍경을 복 수 있습니다. 바로 부산 남항 외항의 묘박지(錨泊地)입니다. 부산항에 들어오는 화물선이나 원양어선, 선박 수리나 급유를 위해 찾아오는 선박들이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하루 평균 70~80척이 머물고 있으며, 일거리가 없어 장기 대기 중인 빈 배들도 있습니다. 조류의 흐름에 따라 닻을 내린 탓에 뱃머리가 일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마을을 떠받치는 축대

절영해안산책로에서 흰여울문화마을을 떠받치고 있는

축대들은 원래 집과 텃밭, 돼지축사 등이 있던 경사진 언덕이었습니다.

태풍과 강한 바닷바람으로 인해 이전의 축대가 무너지면서

1988~1989년 방제 보강 사업을 통해 지금의 축대가 조성되었습니다.

꼬막집과 대야

흰여울문화마을에는 꼬막을 닮은 작은 집들이 많습니다.

피란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지어올린 하꼬방이 집이 된 까닭입니다. 집 앞 골목에는 작은 텃밭들이 있습니다.

고무대야와 플라스틱 다라이 속에 푸성귀가 자랍니다.

씨 뿌릴 땅 하나 없이 모두 집터가 되어버린 흰여울길의 이색적인 모습입니다.






















용두산(49m)은 부산 시내에 있는 구릉으로서 부산 3명산의 하나이다.

옛날에는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하였다가

그 후 산세가 흡사 용 모양이어서 일본에서 건너오는 왜구들을 삼켜버릴 기상이라 하여 용두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8 ·15광복 전에는 일본인들이 신사(神社)를 세웠던 산이며,

지금은 척화비·충혼탑·4 ·19의거 기념탑·이충무공 동상 등이 있고, 부산탑이 세워졌다.

6·25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을 지었는데 2차에 걸친 대화재로 민둥산이 되었으나,

그후 식림에 주력한 결과 지금은 아름다운 공원으로 가꾸어졌다.

자유당 때에 우남공원(雩南公園)이라 하다가 4 ·19혁명 후에 다시 용두산공원으로 환원되었다.

부산항과 영도(影島)가 내려다보이는 경승지이며, 특히 부산탑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아름답다.







▼ 2018년 조선통신사 축제 거리 퍼포먼스

    용두산 공원 ~ 광복로 입구

     조선통신사 평화의 행렬에 참가하는 한일 양국의 예술단 맛보기 공연

조선통신사는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한 국가 사절단

한양에서 쓰시마까지의 행렬에 일본과 조선은 '통신(通信)' 이란 말처럼 신의를 나누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을 조선통신사라고 한다.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이 전쟁은 조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사명대사 유정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였다. 이후, 도쿠가와(德川)바쿠후(幕府)는 조선통신사의 일본방문을 '쇼군(將軍) 일대의 의식'으로 매우 중요시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 까지의 약200여년 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번에 걸쳐 방문하였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경사나 쇼군의 계승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답서를 받았다. 제2회 방문은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에서, 제12회 방문은 쓰시마(対馬)까지 였으나, 그 외에는 모두 에도까지 왕복하였고 제4회 부터 제6회까지는 닛코(日光)에도 방문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館)의 삼사(三使)이하, 화원(画員)·의원(医院)·역관(駅官)·악사(樂士)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일본의 수도인 에도(江戸)까지는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왕복 약3,000㎞의 여행이었다. 긴 여로의 곳곳에서 통신사는 일본의 많은 문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조선통신사의 선단(船團)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 각 계층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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