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산
2012년 11월 25일
도덕산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영천시 고경면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가 703m이다. 도덕산은 자옥산과 이웃해 있으며 낙동정맥이 해안가를 타고 줄곳 남하 하다가 이곳 도덕산에 와서는 그 기세를 누그러 뜨리고 내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지점이기도 하며, 경주시 안강읍과 영천시 고경면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703미터의 아담한 산이다. 산세가 그리 빼어나지는 못하지만 산자락으로 유서깊은 문화유적이 흥건하여 반드시 한 번은 올라야 할 산이다. 국보 40호인 정혜사지 13층석탑이며 조선시대 영남오현의 한 분이신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우고 기거하신 독락당(獨樂堂 보물 413호)과 계정(溪亭)의 즐비한 고목과 중국주엽나무(천연기념물115호)며 명필 한석봉, 퇴계 이황, 아계 이산해 선생들의 친필 현판글씨며 선조 5년(1572년)에 이언적선생을 제향하기 위해서 세운 옥산서원(玉山書原 사적154호)과 그곳에 보관중인 보물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 525호인 보물 삼국사기, 526호인 해동명적 등 약 230종의 2197권의 책이며, 최근에 세웠으나 먼 훗날 명소로 남게 될 염불종의 총본산인 대가람 대흥사등 자락자락에 둘러보아야 할 곳이 수두룩하다. 정상의 넓은 반석들에 올라서면 안강벌판과 포항 그리고 멀리 동해바다 및 호미곶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 알려지지 않은 관계로 지역 산꾼들이 간간이 찾고 낙동정맥을 찾는 이들을 가끔 만날 수 있다. 산행은 자옥산,도덕산을 경유하여 봉좌산과 어래산을 종주하면 약 7시간이 소요되며, 도덕산에서 도덕암으로 하산을 하여 보믈을 관람하고 옥산1리까지 원점회귀를 한다면 약 4시간30분이 소요된다.
도덕암
신라 35대 경덕왕(742~765년) 때 세운 천이백년 고찰로 전해오고 있으나, 뚜렷한 사적기가 없어 이후 연혁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대웅전 안에 봉안된 후불탱화가 1899년 조성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이전부터 암자로서 존립해 온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특히 요사 뒤편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 위치한 편평한 암반 자리는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에게는 산신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현재는 산령각은 헐고 없으나 기도도량으로서 곳곳에 촛불 흔적들이 보인다.
▼옥산 저수지
옥산서원
-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
옥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
문은 퇴계 회왕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옥산서원은 선
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
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
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 옆
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
언적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재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386
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
원은 조선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淨惠寺址13層石塔)
정혜사지에 있는 13층석탑은 국보 제 40호로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를 보이는 이형탑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경주 망덕사 동서 쌍탑이 13층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 탑은 통일신라 전시기에 걸쳐 유행하던 이중기단을 생략한 채 단층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지금은 흙으로 메워 볼 수 없으나 토축(土築)기단 탑 주위에 흙으로 축대를 쌓은 기단으로 별도의 기단이 없다 .
토축기단이 있을 당시의 입면도
일제시대 13층석탑의 모습
1967년의 13층석탑
흙으로 메우기전 13층석탑의 토축기단
현재의 정혜사지12층석탑
(흙으로 된 기단부를 메워서 보이지 않고 탑신받침만 보인다)
<정혜사터 십삼층석탑>
그런데 건축가인 목수 신영훈 선생은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 대하여 이색적인 견해를 제시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1층은 넓고 든든한 구조이나 그 위로 조성된 상층부는 갑자기 작아졌다. 여느 석탑에 비하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이상한 형체이다. 그러나 이 탑이 중국의 승덕사 13층탑과 같은 유형을 추상하여 석탑으로 조성한 예를 남긴 것이라 하면 1층 목조 툇간으로 인해 1층이 상층부에 비하여 그렇게 독특한 모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건축물은 기능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에 기능이 폐기되면 그 건물은 존재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탑의 1층 둘레에 툇간을 둔 것으로 가정하면 분황사 탑이나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의 기단부가 탑신부에 비하여 지나치게 큰 이유도 말끔히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혜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鄕土의 史書인 東京通志에 따르면 37대 宣德王 원년(780)에 당의 白宇經이라는 자가 당나라로부터 망명을 와서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 그는 경치가 뛰어난 곳을 골라 迎月堂과 萬歲庵을 세웠는데 왕도 행차한 바가 있었다고 하며,후에 이곳을 고쳐 세워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용한 원전을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황실을 위해 창건했던 망덕사의 동서목조쌍탑의 경우 탑의 층수가 13층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곳의 석탑이 13층이라는 것은 위의 史實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아진다.
통일신라기 전시기에 걸쳐서도 13층 석탑의 존재는 이곳 외에는 확인할 수가 없다. 즉,13층이라는 수자는 석탑에 있어서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서 이는 중국적 요소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東京雜記에서는 신라때의 절이기는 하나 창건년대를 알 수 없고 회재선생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다는 것과 불전에 남아 있던 탁자의 다리에 "致和元年正月造"라는 글이 있었다는 것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치화원년은 고려 충숙왕 15년(1328)으로 이 절의 창건년대와는 거리가 있다.
사지에는 13층석탑만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다른 예가 없는 독특한 양식이며 신라인의 창조성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탑의 기단은 단층으로 빈약한 느낌을 주는데 그 위에 1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며 초층만 탑신이 크고 隅柱 및 門柱 그리고 門이 있으며 內部는 차있고(充塞) 木造建築의 構造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제 2층부터는 塔身部와 같은 모양이 되었고 上輪部에는 露盤만 남아 있다. 즉,이 석탑은 탑신의 層位에 있어 보기 드문 13층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의 탑신부가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줄어든 점 등이 특이하다.
그리고 초층옥신 4면에 龕形의 開設과 아울러 기단부의 축조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각부양식과 조성수법을 검토하여 조성연대를 추정해보면 우선 초층부는 목조탑을 모방한 듯한 고식의 세부를 지니고 있는 점도 엿보이고 있으나, 각 옥개석 아랫면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약화된 것은 역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 석탑은 1922년경 일본인에 의하여 수리된 것이라 하는데 보수공사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다만 탑신부 위층의 3층이 떨어져 있던 것을 제자리에 올려 놓았으며 기단을 시멘트로 굳혀 놓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단부의 시멘트 固着도 그 뒤 파손되어서 큼직한 잡석으로 기단을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