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따라

충주 남산 . 계명산

화이트 베어 2013. 6. 10.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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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요일 : 2013년 6월 9일(일요일 )

산행지역 : 충주 남산 . 계명산

누구하고 : 산으로클럽 정기산행  44명

지역날씨 : 맑음 온도 19τ ∼ 32τ (충주날씨)

산행코스 : 남산 주차장~ 깔딱고개~ 남산~ 마즈막재~ 계명산~하종

                    5시간 10분 (09:50-15:00)

충주남산의
깔딱고개를
힘들게넘어
마즈막재서
점심을먹고

과일도냠냠

곡주도한잔
깔딱고개를
또한번넘어
계명산도착
하산할때는

아주빠알간
딸기도먹고
오디따먹고

달콤한것이
혀는까막꼬

기분은만땅

강건너저기

 금수산인가?

 월악산인가?

풍광도멋져
충주호전망
끝내주내요
ㅎㅎㅎㅎㅎ

산으로클럽

충주남산과

계명산산행

즐거운산행
                                       수고하셨수~~~2013년 6월 9일 일요일

 

 

@ 남산; 금봉산(663m)이라고도 하며 충주시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예전에 봉황이 살던 성스러운 산이다. 계명산과 함께 충주시를 병풍처럼 둘러쌓고 있는 산으로, 두 산을 오르면 충주의 정기를 듬뿍 받을 수 있다. 금봉산에서는 충주시내를, 계명산에서는 충주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수 있다.

@계명산; 계족산(774m)이라 불리웠으나 풍수설에 의해 분산을 뜻하기때문에 충주에 큰 부자가 나지 않는다하여, 1956년 시 승격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공모한것이 계명산이다.(계명산: 여명을 알리는 산)

충주가 옛 백제 영토일때 마고성주의 딸이 산기슭에서 지네에 물려 앓다가 죽게 되자 지네를 퇴치하기위해 고심하던 마고 성주가 심항산 마루에서 치성을 드리던중 꿈에 신령이 나타나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닭을 풀어놓으라` 하여 닭을 풀어놓으니 지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오동산 또는 심항산이라불리던산이 계족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충주 산성 (마고 산성); 금봉산 정상을 둘러싼 석축산성으로, 전설에 의하면 금단산 수정봉에 은거하고 있던 마고 할미(늙은 신선할미)가 하늘의 법도를 어기고 마구 살생하자 대노한 옥황상제가 하천산 노둑봉으로 쫓아냈다. 500년이 지난후 마고 할미가 잘못을 뉘우치고 금단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 빌자, 옥황상제는 금봉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처소를 삼도록 하되 성은 반드시 북두칠성을따라 한 별씩 7일동안 쌓게 하였다. 마고할미가 명을받고 이 산에 이르니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좋아 흡족하게 생각하고 7일만에 성을 쌓았다. 그러나 옥황상제가 살고있는 서쪽을 향해 수구가 뚫려 있는 것을 보고 괘씸하게 생각한 옥황상제는 마고할미를 성주가 아닌 성지기로 삼았다. 그래서 마고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축성의 법칙에 의하면 수구문은 서쪽으로 내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산성중 유일하게 수구문이 서쪽으로 난 성이다.

백제 구이왕(420~426)때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개로왕 21년(475년)백제 도읍지 후보지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둘레가 1,120m, 높이는 5~7m이며 4곳에 성문이 있다. 이후 신라 진흥왕(540~575)때 난장성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마즈막재; 옛날 강원일부와 영남 방면 죄수들을 충주 감영으로 이송 사형시킬때 이고개를 넘으면 다시는 돌아갈수 없다하여 마지막이라는 뜻에서 이지방 방언인 마즈막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재 근처에 사형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몽 항쟁 전승 기념탑;1523년 몽고군은 다섯번째로 고려를 침략하여 충주산성 공략에 나섰다. 산성에는 침략군을 피해 들어간 이지역의 관리, 군병,농민,승려 ,노비등이 함께하고 있었고, 방호별감 김윤후(승병장)는 이들을 지휘하여 몽고군의 대공세에 맞섰다. 공방전이 장기전으로 접어들자 성안에는 식량조차 바닥이 났고, 위기는 눈앞까지 당도하게 됬다. 그때 김윤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만일 힘을 다해 적을 막는다면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벼슬을 내리겠소" 성 안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이르기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고, 견디지 못한 몽고군은 포위를 풀고 고려땅에서 철수했다. 싸움이 끝나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약속대로 신분에 관계없이 관직이 내려졌다. 이때 이곳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충주사람들에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고려 태조23년(940)에 처음 충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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